독일문학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나라의 정서와 닮은 점이 많다는 걸 느낀다.
게다가 꽤 열심내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이 책의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어린시절 생각이 흐르는 방향에 격하게 공감했다.
가족이나 친구끼리도 정치와 종교이야긴 하는게 아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예민한 화두이긴 하지만,
어차피 내 생각을 적는 블로그인데 한번도 입밖으로 내어보지 않은 이야기를
<데미안>을 계기로 조심스레 풀어 볼까 한다.
종교계의 소문이 그닥 좋지 않다.
특히 기독교는 개독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좋지 않은 소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유명 목사와 큰 교회의 인사들이
아동과 여성을 향한 성폭행, 성추행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온다.
더이상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썩어있고
그것이 이제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울 만큼 주변에 파다하다.
하지만 난 기독교의 이런 것을 비판하고 겨냥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린시절부터 내가 겪어온 것들에 대해
<데미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처럼 거쳐온 과정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
소위 '모태신앙'인 나는 어린시절부터 꽤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다.
어릴적 친구들은 거의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 시절 교회는 내게 가장 좋은 학교이자 놀이터였다.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듣고 배울 수 있었고, 친구들 또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순간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시절 교회의 정치색을 그대로 듣고 목격하고 난 후부터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가인의 표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못듣고 아무것도 못 보았더라면 난 여전히 교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곳은 여전히 내 공기같은 공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 부터 모든것이 달라졌다.
가인과 아벨이야기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부당했다.
야곱의 이야기도 이상했다. 절대 공평하지 않고, 부도덕했다.
살인자들이 보호받고 피해자는 그저 죽을 뿐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 중 마지막 순간에
예수에게 죄를 고하고 회개한 살인자는 그냥 비겁자로 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자기 혼자 꼿꼿히 죽어간 살인자가 차라리 멋있어 보일 만큼.
데미안이 들려주는 하는 이야기는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데미안이 씌여졌다면 기독교계에서는 금서가 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했던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입에 선악과가 물린지도 모르고 먹은 죄로, 교회는 이제 더이상 즐겁고 거룩한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이질감이 느껴지고, 나만 이상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까만양이 된 기분이랄까. 순한 하얀양인 것처럼 무리에 섞여있어도 어딘가 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나도 싱클레어처럼 가인의 표적을 받은 것일지도.
내가 서두에 종교계의 소식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 한 것도
어쩌면 내가 가인의 표적을 받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정치색을 듣고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여전히 잘못된 이들을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무작정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생각 없다. 정확히 수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사람은 보고싶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 존재다.
사람은 참 이기적인 존재다.
종교에 관해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사춘기시절 끊임없이 날 괴롭히고 고뇌하게 했던 고민들이 <데미안>에 딱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그 때 이 책을 읽었으면 날 더 혼란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과 고민을 그대로 옮겨 적어둔 듯한 <데미안>에 책을 읽는 내내 놀라고 감탄했다.
분명 작가도 이런 고민을 했을거야. 경험한걸거야. 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옮긴이의 해설에 보면 헤르만헤세 역시
이와 같은 비슷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자랐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이런 데서 소설의 매력을 느낀다.
너무 구구절절하고 주관적이라 영화처럼 장면구성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일들은 소설로 풀어내면 된다.
또한번 소설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즐거운 경험을 얻는다.
뭐 어쨌든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선악과>라고 짓겠다.
듣기순간 죄책감이 느껴지면서도 달콤한.. 선을 가장한 악의 과실, 선악과.
<데미안>을 읽는 내내 싱클레어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연민의 감정이 들끓는다.
*
내가 사춘기시절에 데미안을 알았든 몰랐든 어쨌든 나는 가인의 표적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좀 이상했다.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어두웠고, 지나치게 생각하는 척 했다.
생각이 깊은 척 잘난척도 했고, 너희들과 다르다는 약간의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의 나는 공허함 뿐이었다.
내 안에 갇혀서 누가 뭐라든 별로 상처받지 않았고, 그다지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이 날 이상하게 보더라도 너희는 절대 날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내 발 아래 두고 혼자 비웃었던 그 어리석은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서 싱클레어가 잘난척하며 데미안에게 떠들어댔을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너, 너무 잘난 척하며 말하고 있어."라며 했던 말이 내게도 깊이 쿡 박혀왔다.
생각해보면 나도 언제나 "데미안"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나에게 새로운 시각과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나만 해온 것이 아니라는 동질감을 불어넣어 줄
정신적인 동료와 스승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남들과 조금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재밌기도 하지만 참 외로운 일이다.
물론, 모두들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평균이라는 게 있지 않나.
어떻게 살든, 내 인생인데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지, 라며 잘 지내다가도
신체리듬처럼 어느순간 반드시 찾아오는 절망감과 박탈감은 나를 항상 괴롭혀댔었다.
예술바닥에서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극히 가끔, 그리고 개인적이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정말 즐겁고 심장이 뛰지만
지나면 지날 수록 경험상 서로를 옭아매고 나를 갉아먹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난 최근, 한명의 데미안을 보냈고 다음 데미안을 찾고 있었나보다.
결국엔 나도 데미안에게서 독립해야겠지만.
이런 와중에 이 책이 내 손에 잡혔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생각들을 이토록 명확하게, 아니 좀 더 깊게 보여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데미안을 다시 읽을 때는 어떤 다른 생각이 들지, 보일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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