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별렀다.
몇 번의 기회를 놓치고 이제야 보게 된 공연.
관람 후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한동안 아렸더랬다.
벼르고 있었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기대를 갖고 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공연은 '나를 공연'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공연이다.
그만큼 깊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빨래>는 외로운 이들을 위한 공연이다.
굳이 서울살이만 외로운 것은 아니겠지.
인생 살아가는 것이 외로움일텐데,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건 얼마나 슬프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니.
혹은, 직장인들을 위한 공연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참아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라기보다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버려지는 사람들.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난 이제 어른인데도.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인물들은 술에 취하고, 목이 쉬도록 울부짖고, 맞고, 쓰러진다.
보는 내내 짜증스러움이 있었던건 거기서 시궁창일지도 모르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위로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공연이지.
되뇌이게 되는 가사들이 있었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 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거야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 처럼
슬픈 네 눈물도 마를거야
자, 힘을 내
역시 뮤지컬은 음악.
하지만 내가 위로받은 것은 이 곡의 가사가 다는 아니다.
딱 한마디였다.
나영이 비척비척 걸어와 차마 외로울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희정엄마와 주인할매에게 겨우겨우 쥐어짜 내뱉어버린 말.
"흐어어어엉... 흡.. 고맙..흡...습니다아아어어어엉.."
그냥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배우의 호흡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희정엄마와 주인할매의 말이 위로가 되어서 고마웠던걸까?
아니, 그냥 들어줘서 고마워요 였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거다, 나였다면.
정말 그렇다. 빨래는 살아간다는 증거다.
살아있으니까 빨래를 하는거다.
나의 삶의 모양에 따라 빨래도 달라진다.
하얀 기저귀, 남자 팬티, 하얀 블라우스, 둘둘 말린 스타킹.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또 하루를 살아내요
* 2011년 7월 13일 포스트 옮김
'문화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즈 인 더 트랩] 난 반댈세! (0) | 2018.03.29 |
---|---|
[6시퇴근] (0) | 2016.07.02 |
[포장마차] (0) | 2016.07.02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그들도 어른이다. (0) | 2016.07.02 |
[스프링어웨이크닝] 쌩난리부르스 (0) | 2016.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