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몇사람의 진한 인생 이야기를 보았다.

 

"하판사님은 퇴근 후에도 근엄한 판사인가요?"

"저는 퇴근 후엔 피고인이 되죠."

- 보헤미안 랩소디 中

 

우연한 한마디로 인해 마음의 지옥문이 열린 판사가 철저한 피고인이 된 이야기이다.

심신이 지친 하판사의 정신분석 과정과 함께 하판사가 겪은 재판이 회고된다.

 

이 소설에 대한 소설가 구효서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분석학 같은 전문 영역을 소설에 끌어들일 때
대개 그것은 독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용도로 쓰이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불의의 집단에 의해 회유와 기만의 용도로 쓰인다"고 했다.

책 뒤에 기재된 이 멘션을 읽고도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뒷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

 

나는 대학때 연극치료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수업은 심리학개론 같은 이론 수업이 아니라 수업과정이 치료과정인 수업이었다.

나는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고, 후일에 좀 더 깊은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수강을 신청했다.

하지만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다른 수강생과 달리 참여자가 아니라 방관자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업을 받는 동안 괴로움에 몸부림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시절의 상처와 지금의 나.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몸까지 아플 정도로 괴로워 했었다.

 

그 때 일이 왜 지금 떠오르는 지 고민해 봤다.

한가지 질문에 나는 아직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처에 관한 심리치료는 필수인 것인가?" 라는 것이다.

나는 심리치료를 경험하고 치유하고 싶다. 분명히. 하지만 심리 치료에 관한 거부감이 있다.

아마 그 거부감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그 필요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발생하는 거부감일 것
이다.

이 소설을 보니 더욱 확실해 진다.

마음의 상처에 ​심리 치료가 모두 옳은 처방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하판사는 정신분석학으로 심적으로 위로를 얻고,
자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는 계기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나는 하판사가 정신분석을 받은 것은 '긁어 부스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그 용도로 쓰이긴 했지만.​

하판사를 보면서 부스럼이 생길까 걱정하는 나를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을 전공한 한 지인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심리학의 끝에는 허무밖에 남지 않았어."

물론 심리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경험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내가 내린 답이 정말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언제나 옳은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나'는 그 처방이 옳은 것인가?​

누군가는 내가 "아직 그 상처를 딛을 때가 되지 않아서"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말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제 그 말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하판사는 이 책의 마지막 장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마음이 편해졌을까?

나는 하판사가 받은 정신분석은 또 다른 상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

 

이 소설을 보고 나니 선과 악이 아주아주 쓸모없고 의미없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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