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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김애란' 작가님의 이름은 시작과 같은 의미다.
매년 다독을 목표하지만 대체로 3~4개월 지나면 독서는 다른 일에 밀리고 만다.
퍼뜩 정신 차려보면 그 상태로 1, 2개월은 우습게 지나가 있다.
독서를 숙제처럼 생각진 않다. 다만 독서의 흐름을 탔을 때 차오르는 감정과 생각의 흐름들을 좋아한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다독을 목표로 삼는다.

해는 운이 좋다 해의 중반기에 김애란 작가의 신작이 나왔기 때문이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다시 독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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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책 한권을 필사한다기보단 독서하면서 문장을 수집하는 의미로 필사를 시작해보았다.
그 중 몇가지를 여기에도 적어두려 한다.

만일 어느 작품 속 인물이 평편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표현됐다면, 부조리한데 그럴법하고, 전적으로 지지할 순 없으되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게 그려졌다면, 그건 그 작가가 유능하다기보다(혹은 그 능력에 앞서) 겸손하기 때문에 이뤄진 일이라고 믿어서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말 주변에서, 말주변 찾기) 중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점, 선, 면, 겹) 중
얼마 전 '미개'라는 말이 문제가 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
거기 모인 이들의 분노와 원망, 무기력과 절망, 죄책감과 슬픔도 결국 모두 산 자의 것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던 건, 죽은 자들은 그중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산 자들이 느끼는 그 비루한 것들의 목록 안에서조차 그들이 누릴 몫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
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중략)...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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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둔 문장을 보고 느낀건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라는 단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2014년 봄,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작가님은 마음 깊이 아파한 듯하다.
그 때 대한민국은 집단 우울증을 앓았던 게 생각난다.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왈가왈부 할 수 없고, 할 말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
그저 그 주변 언저리에서 '이해'라는 단어에 대해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해볼 뿐이다.

어릴적 한참 예민했던 중학생 시절에, 누군가 나에 대해 '안다'라고 말하는 것에 큰 저항감과 분노를 가졌다.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나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걸까'
누군가 나에 대해 아는 체 한다거나 나의 친구를 자처하던 이들에게 하악질을 했던 것 같다.

이유는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가족과 종교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그들을 향해 불신으로 벽을 치던 때였다.
다시 생각하면 그 때의 내가 참 불쌍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무서운데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한껏 긴장을 타고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하악질해댔다. 정작 할퀴진 못했겠지만 시늉이라도 죽어라 해댔다.
어쩌면 내 헛발질에 누군가는 상처입었을지도 모른다.

짐작컨대 누군가 나에게 어설픈 위로를 건넬까봐 그게 싫어서 였을거다.
어설픈 위로로 위장한 호기심이 더 겁났을거다.
호기심을 채운 사람의 혀는 순식간에 무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다가온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나의 상태가 위로를 받을만한 상황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해와 위로는 꼭 전하지 않을 때가 더 나을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군가 위로할 일이 생긴다면 나는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1. 그 일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한다면 경청하되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2. '힘 내', '울지 마', '이해해' 같은 가볍고도 위로로 위장한 적당히 빠른 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네가 괜찮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을 전한다. 나머지 말에 대해선 침묵을 지킨다.
3. 원한다면 그 옆을 지킨다. 그냥 행동을 한다.

나에게 '이해'라는 단어는 '오지랖'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예민한 단어이다.
김애란 작가님이 수필에서 쓴 단어의 뜻들이 내게도 와닿는 부분이 많아 더욱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가끔 '내가 미친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때는 기발한 상상과 엉뚱한 발상이라고 내심 즐거워하며 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그 뜻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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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사람이 많은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서 날 치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는 칼을 들고 있을것 같고, 그 칼에 꼭 내가 찔릴 것만 같은 아찔한 상상이 자꾸만 든다.

당연히 전철이나 버스도 싫다.

닫힌 공간에서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있으면 으레 나는 땀냄새, 입냄새, 머리냄새, 몸냄새, 발냄새와 그 습기, 전철 의자의 절은 내와 음식냄새와 노인들 특유의 몸내, 노숙자들의 냄새들에 먼저 질린다.

이정도는 누구나가 싫어할만한 상황이다.

언젠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아직 내릴 역이 아닌데 구역질이 나 그대로 뛰어나와 그 사람 많은 곳 공용 쓰레기통에 토사물을 뱉어낸 적이 있다.

"아침부터 왠 취객" 하면서 지나가던 한 여자의 경멸어린 말에 욱하면서도 쓰레기통에서 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론 난 취하지 않았고, 어제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빈 속이라 허연 거품만 가득한 위액이 넘어왔을 뿐이다.

부끄러움보다는 혼란스러움과 당황스러움에 지하에서 나가는 데 급했던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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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받거나 힘든 날, 이런 식으로 당황스러운 일들이 '나한테 심리적 장애가 있나'라고 생각하게 한다.

비행운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단편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아주 불편한 감정을 떠올렸다.

비참함, 경멸과 공포, 혹은 우울감, 고립감, 죄책감, 무언가에 대한 원망, 수치심, 열등감 등 온갖 불편한 감정들이 읽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우습게도 내가 느껴봤던 뭐라 설명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문자로 표현되는 것만 같았다.

읽으면서는 잘 표현할수 없었던 생각들니 단편집 뒷부분의 해설파트를 읽고나서야 정리다 됐다고 한다면 너무 베끼는 것 같을까.

내가 느꼈던 공감되면서도 아주 불편한 감정들이 극도의 고립감과 광장공포라는걸.

내가 김애란 작가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작가의 말에 씌여있었다.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름을 짓는다.
여러 개의 문장을 길게 이어서
누구도 한번에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기어코 다 부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알수 없어
한번 더 불러보게 만드는 그런 이름을.

나는 그게 소설의 구실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달려이 아비>나 <침이 고인다>를 읽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도 표현하는 구나'라며 무릎을 탁탁 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두근두근 내인생>에서는 단어를 찾는다는 표현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나도 언제나 단어를 찾고 싶어했으니까.

나는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김애란 작가의 매력은 그것과는 다른 매력인 것 같다.

친근감 있는 어휘에다 적절해서 와닿는 신선한 표현때문에 재미있다.

그리고 통통 튀고 발랄한 매력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하나하나 전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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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단편이 쓰고 싶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누군가도 느낄까.

내가 찾아내고 이어붙인 말들로.




김애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 2012년이었던 것 같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는 내게 "어쩌면 네가 좋아할 지도 모르는" 작가라며 단편집을 쥐어주었다.


그 때 나는 어릴적 잃었던 독서라는 취미를 다시 붙이고 있었다.

이유는 단지 남자친구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였다.


나는 솔직히 책은 술술 잘 읽었고 읽은 책도 많았지만(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지만),
설을 시간 들여서 읽어야 하는 의미를 찾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그 땐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사람도 만나고,
잠도 자야하고 
해야 할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2~3시간이면 볼 수 있는 영화나 공연만 해도 충분한데
굳이 소설책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너무 헛웃음이 나오는 생각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계발서나 참고서 따위의 책들만 찾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의 고리를 끊고, 소설의 매력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 책이 이 책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한동안 단편의 매력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소설을 고르고, 어떤 부분이 나에게 좋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자마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김애란 작가의 특징이 뚜렷하게 느껴졌던 책이었다.

낭랑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실제로 어릴 적을 기억이나 하는 듯 담담하게 묘사한 글이나, 문체, 그리고 내용까지 모두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김애란 작가는 자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그리는 가족이야기는 항상 자기에 대한 고민과 가족에 대한 고민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그 안의 생각들이 공감으로 다가왔다.


"나도 이렇게 생각해 본적 있는데."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이렇게 말하는 구나."


특히 김애란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듯 한데,

이상하게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절대 부정적인 존재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솔직히 너무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글을 쓰면 작가의 생각이 짙게 배어나올 수밖에 없고,
본인의 생각을 기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밉지만 절대 미워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담담하면서도 마냥 어둡지 않고 낭랑하고 긍정적인 그녀의 말투와 생각에 매력을 느꼈지만 말이다.


혹시나 해서 해설부분을 뒤져보니 그부분에 대한 설명이 간단히 있었다.

아버지를 긍정함으로 자신을 긍정한다고 써있는데,

솔직히 이 말이 완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내가 느낀 부분이 그녀가 특별한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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